‘優2父'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나누는 아들 둘 가진 아빠의 블로그입니다^^

  • 2020. 2. 12.

    by. Woo2father

    목차

      드디어 원고시대(遠古時代)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 글 끝에도 언급했지만,
      사실 오늘의 인물은 
      원고시대(遠古時代)의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고시대의 이야기를 
      모두 허구로 보고, 중국의 역사 기록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가 누구일까?’
      라고 질문한다면..
      아마도 이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바로..
      전한시대(前漢時代)의 역사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입니다.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사마천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이징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원인의 두개골은
      50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어 그것이 중원의
      최고 조상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웬걸?
      남전(藍田)-80만년 전, 원모(元謀)-170만년 전 등지에서
      비교도 안 될 형님들이 새로 나타났지'

      고우영의 십팔사략 1권 41페이지

       

       


      세월이 흘러서,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의 중국에는
      4개의 종족이 떼지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적족(狄族), 강족(羌族), 이족(夷族) ,묘족(苗族)
      (이족(夷族)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중국 역사를 잘 정리한
      사마천(司馬遷)

       

      사마천 이미지 (출처 : 인물세계사)


      그는..
      ‘반고, 여와, 신예, 상아 ...
      그따위들은 죄다 가짜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스토리다!
      고로 역사는 황제(黃帝)부터
      기술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삼황 부분은 과감히 자라버리고
      오제로부터 역사를 서술했습니다.

       

      삼황오제(자세한건 이후 포스팅을 참조해주세요^^)


      그 책이 바로 ‘사기(史記)’입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왜 썼을까요?

      사마천(司馬遷)의 집안은 
      대대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명문가문입니다.

      태사령(太史令)이란 당시 
      천문(天文), 역법(曆法), 역사(曆史) 
      등등의 기록과 저술을 맡았던 관직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36세 되던 해.

      부친이 깊은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하며 유언을 남깁니다.

      ‘너는 내가 못다 한 일을 
      반드시 완성해 주길 바란다. 
      우리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서
      정리하는 대업을 완수해라.’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사마천은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여행을 해서 견문을 넓힙니다.

      선친께서 바라시던 대로
      그도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전문 서적도 탐독하였습니다.

      그는 한 무제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3년)부터
      ‘사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에는 사기를 쓰기 시작한 시기를
      기원전 141년으로 기록하였는데,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기원전 145년경 출생했다고 추정하는
      사마천이141년에 집필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오기로
      판단되어, 기원전 103년으로 수정합니다.)

       

      방대한 역사를 총망라했던 사마천입니다!


      그러다가..
      이릉(李陵)의 사건 에 연루되어..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에 대해
      사마천이 어쩔 수 없는 투항이라고 
      변호한 일)

      임금의 노여움을 사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기 싫으면 딱 두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 금전 속죄. 황금 3만 8천근을 바치고
      서인으로 떨어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다른 기록은 돈 50만전이라고도 합니다.)

      둘째. 궁형(宮刑)
      궁형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입니다.


      당시에는 궁형을 받고 구걸하듯 
      목숨을 부지한 자는 사람 축에 끼지를 못했습니다.

      상장군의 아들 진평(陳平)이 
      사기꾼 패거리에 걸려
      보증을 잘못 섰다가 
      죄인으로 몰렸습니다.

      진평은 스스로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형을 거절하고 궁형을 자청하였습니다.

      그 뒤로
      어디를 가나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당대의 박사였던 간서(間徐)선생도
      사형 집행 전에 궁형으로 살아났는데,

      구름처럼 몰려와 제자 되기를
      간청하는 무리들이 하루 아침에 
      안개 걷히듯 사라져가고,

      금값보다 무거웠던 그분의 저서는
      개도 아니 물어가고
      수첩에 적어가며 경청하던 강의도
      그날부터 헛소리 간주되며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궁형을 거절하고
      몸이 찢겨 죽은 살인범이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죽은 뒤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마천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깨끗이 죽자니 아버님의 유언이 걸리고,
      살아서 글을 쓰자니 궁형이 문제로다!’

      그러나 
      그 동안 배우고 외웠던 역사의 줄거리와
      발로 뛰며 보고 알았던 현장들
      더구나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어...

      그는 결국
      궁형을 택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20여년간
      130권의 역사책을 쓰니
      그것이 바로 ‘사기’(史記)입니다.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본인이 해야 할 과업을 끝까지 
      완수한 사마천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알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두번째 장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 사견이 들어가다보니 글이 점점 길어지네요. 
      계속해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優2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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